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문단 편집) === 즉위와 고난의 연속 === ||||<:>[[파일:external/farm9.staticflickr.com/8497151143_1450615883_z.jpg]]|| > 신격화된 [[안토니누스 피우스|피우스]]가 죽은 뒤 원로원에 의해 국정을 떠맡게 된 마르쿠스는 동생에게 [[루키우스 베루스|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콤모두스]]라는 이름을 주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제국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 >---- >《로마 황제 열전》 유례 없는 23년 간의 평온한 통치기를 보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에서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중 장남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때 40세에 접어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황제 즉위를 요청한 원로원에게 본인과 함께 동생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즉위도 요청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최초로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 형제에게 황제 취임을 요청했고, 두 형제는 관례대로 먼저 사양한 뒤 재요청을 받고 제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공동 황제에 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즉위 전까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일찌감치 제왕 교육을 받아왔던 사람이었다. 또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동안 사실상 공동 황제로 있으면서, 엄청난 양의 서신을 손수 처리하고 행정 업무도 대행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유능한 행정가이자 준비된 황제로 평가받았는데, 문제는 ~~앞으로 있을 시련을 생각하면~~ '''군무 경험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이는 마르쿠스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두 형제가 이렇게 된 원인은 두 사람이 군 복무를 피하려고 하거나, 숭문천무 생각 탓이 아니었고, 전임 황제이자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제왕 교육 방법 때문이었다. 선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친아들 두 명이 모두 자녀없이 요절했고, 장녀마저 결혼 직후 죽은 탓에 즉위 이전 양자로 맞이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와 양자 입적 전 약속을 했음에도, 일찍부터 마르쿠스 및 루키우스와 같이 살았다. 이때 그는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모두에게 명예로운 공직 경험 코스를 밞도록 했고, 당대 최고의 명사들을 로마 황궁으로 초빙해 두 사람을 위한 제왕 교육을 진행했다. 아울러 안토니누스는 늘 자신의 여행지에 두 아들을 데리고 가 옆에 끼고 살 정도로 [[팔불출|아들 사랑]]이 대단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즉위 이전까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생활했고, 모든 행정 경험도 로마와 이탈리아에 국한되었다.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모두 로마 황제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로 여겨진 군무 경험이 현저히 부족했다. 물론 안토니누스의 목가적이고 가정적인 생활과 교육 방식은 원래부터 친형제 같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만들었고, 두 사람이 즉위 후 훌륭하게 내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즉위 이전 준비된 황제라고 평가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재위 첫 2년간은 제국 전역에서 위기로 가득했다. 수도 로마를 가로질러 흐르는 테베레 강에서는 대홍수가 났고, 시지쿠스 일대에서는 지진이, 갈라티아 일대에서는 가뭄이 발생했다. 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국경 밖에서는 [[게르만족]]이 [[라인강]]을 건너온 뒤 제국의 국경을 위협했다. 이런 골치아픈 상황 속에서 잠잠하던 파르티아까지 그를 괴롭혔는데 젊고 야심많은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 4세]]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내치를 사실상 전담하다시피하면서 파르티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생 루키우스를 동방으로 보낸 뒤, 자신은 더 골치아픈 서방 전선으로 직접 달려가야만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쿠스는 즉위 당시 황제의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좀 더 효과적으로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동생이자 [[하드리아누스]]의 첫 번째 후계자 케이오니우스의 친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두 사람은 친형제가 아니었지만 우애가 두터웠고,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지만[* 진중하고 사색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루키우스 베루스는 낙천적이고 멋쟁이로 유명한데다 행동 역시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이런 성격 차이에도 루키우스는 형 마르쿠스를 진심으로 의지하고 사랑했으며 잘 따랐다.] 처음으로 시도된 이 발상은 효과적이었다. 두 사람은 즉위 후 얼마 안 가 불어닥친 자연재해를 효과적으로 해결했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도나우 전선의 국방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했다. 또한 원로원의 걱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원로원에게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의 공동 황제 즉위를 요청할 당시, 원로원은 젊고 잘생긴 미남이지만 낙천적이고 멋쟁이로 유명한 루키우스 베루스가 자유분방한 행동거지 탓에 황제가 된 뒤 마르쿠스조차도 컨트롤하기 힘들지 않을까 해서 걱정했다고 한다. ]과 달리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는 공동 황제로서 나름 내치와 외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공동 황제였음에도 즉위 직후부터 격무에 시달리는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짐을 크게 덜어주지는 못했다. 여기에 더해 본인보다 건강했던 루키우스가 일찍 요절해버리면서 오히려 재위 기간 동안 마르쿠스는 건강치 못한 몸 상태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인이 득본 건 크게 없었던 공동 황제 발상은 선례를 남겼다. 따라서 '''후기 [[로마 제국]]은 황제를 여럿 두는 공동황제 제도를 통해 산적한 난제에 유기적으로 대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